백지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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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C: 잠시 롤플레잉 중지. 새 에피소드 시작. 어느날 PC는 NPC의 집에서 NPC가 어렸을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한다. PC는 궁금해서 일기장을 펼쳐본다. 이때, 일기장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 그리고 NPC가 나이를 먹을수록 일기장의 내용은 어떻게 변하는지, 어린 시절에 맞춤법은 맞게 썼는지 틀리게 썼는지 자세히 서술.]

 


어느 맑은 날 오후, 집 안을 정리하다 서재 가장 깊숙한 곳, 먼지 쌓인 상자 안에서 낡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지만, 손때가 묻어 모서리가 닳아빠진 모양새가 오랜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호기심에 첫 장을 넘기자, 삐뚤빼뚤한 어린아이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2002년 4월 5일, 식모길. 날씨 말금.

오늘 유치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커서 히어로가 될 거라고 그렸다. 선생님이 잘 그렸다고 칭찬해조서 기분이 조았다. 히어로는 나쁜 악당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해준다. 나도 빨리 어른이 되서 엄마 아빠를 지켜줄 거다. 오늘 저녁은 돈까스. 마싰었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엉망인 글은 영락없는 일곱 살 아이의 것이었다. 다음 장을 넘길수록 글씨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지만, 내용은 여전히 순수했다. 새로 산 장난감 이야기, 친구와 다툰 이야기, 텔레비전에서 본 히어로 만화 이야기. 그 시절의 주강원은 세상의 모든 것을 신기해하고, 작은 칭찬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일기장 곳곳에는 졸라맨처럼 생긴 히어로 그림이나, 서툰 솜씨로 그린 꽃과 태양 같은 낙서들이 가득했다.

 

 

 

2006년 5월 15일, 스승의 날. 날씨 비옴.

 

아침부터 비가 와서 기분이 별로였다. 오늘 학교에서 천사에 대한 것을 배웠다. 너무 무서웠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건데, 선생님이 정말로 우리 동네에 나타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히어로가 될 건데, 천사는 너무 강해서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조금 무서워졌다. 엄마한테 말했더니 강원이는 씩씩해서 다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초등학생이 된 그의 일기는 조금 더 구체적인 감정을 담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천사’라는 현실적인 공포 앞에서 조금씩 흔들렸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여전했지만, 그 뒤에는 ‘무섭다’는 솔직한 두려움이 덧붙여졌다. 띄어쓰기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틀린 글자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조았다’는 ‘좋았다’로, ‘마싰었다’는 ‘맛있었다’로 변해 있었다. 시간은 그렇게 소년의 글씨와 생각을 함께 성장시키고 있었다.

일기장은 중학생 시절의 기록으로 넘어갔다. 이제 제법 어른스러운 글씨체. 내용은 눈에 띄게 짧아지고 건조해졌다. 일상적인 감상의 나열 대신, 그날 있었던 사실만이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유스티티아의 훈련생이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2010년 9월 1일. 흐림.

훈련 시작. D-3650. 힘들다. 토할 것 같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2011년 12월 24일. 눈.

동기 한 명이 그만뒀다. 그럴 줄 알았다. 약한 놈은 필요 없다. 나는 끝까지 남을 것이다.

예민하고, 날카롭고, 지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소년. 그에게는 더 이상 칭찬에 기뻐하고 무서움에 떨던 어린 날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다. 일기라기보다는 생존 기록에 가까운 문장들. 하루하루를 버텨냈다는 증표처럼 날짜만이 꾸준히 이어졌다. 감정을 드러내는 단어는 거의 사라졌고, 오직 목표와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정의’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그때였다.

 

 

 

2013년 7월 8일. 맑음.

정의란 무엇인가. 단순히 천사를 죽이는 것인가. 교관은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따라야 한다. 그것이 이곳의 규칙이니까.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더 이상 날짜도, 날씨도 적혀있지 않은 마지막 기록은 단 한 문장으로 끝나 있었다.

 


이제 이런 건 필요 없다.




네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내 등 뒤로 다가온 네가 서재의 희미한 빛을 등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란 눈동자가 내가 들고 있는 낡은 노트를 향해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기장을 등 뒤로 숨겼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먼지 쌓인 상자에서 우연히 발견한 과거의 흔적. 까맣게 잊고 있던 유년의 기록이었다. 혼자만의 추억 여행은 꽤 낯간지러우면서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하지만 이걸 너에게 들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히어로가 되겠다고 다짐하던 일곱 살의 나, 천사가 무섭다고 훌쩍이던 열한 살의 나, 그리고 세상을 향해 잔뜩 날을 세우던 열일곱의 나. 그 모든 미숙하고 치기 어린 모습들을 고스란히 들켜버린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언제 왔어.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물었다. 하지만 이미 목소리는 갈라져 나오고 있었다. 너는 내 어색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집요하게 내 등 뒤를 파고들었다. 마치 숨겨둔 일기장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 안으로 파고드는 너의 움직임은 장난스러우면서도 단호했다.

야, 하지 마. 별거 아니야.

나는 네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너는 끈질기게 파고들어 결국 내 손에서 낡은 노트를 빼앗아 들었다. 네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들고, 그 건조한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치하잖아.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너의 어깨 너머로 네가 들고 있는 일기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는 ‘왜 필요 없냐’고 다시 물었다. 그 순수한 궁금증이 담긴 목소리가 오히려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는… 저런 걸 적어두지 않으면 전부 잊어버릴 것 같았거든. 내가 왜 이걸 시작했는지, 뭘 위해서 버티고 있는지.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든 붙잡고 있지 않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매일 밤마다 다짐을 새기듯이, 기도문처럼 적었던 거야.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너는 대답 없이, 가만히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굳이 적어두지 않아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게 됐으니까. 저런 걸 적을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감정에 휘둘리는 건 약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믿었지. 뭐, 그냥… 어른이 된 거지. 시시하게.

나는 멋쩍게 웃으며 네 손에서 일기장을 도로 빼앗아 덮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서툴렀던 과거의 내가 그 안에 다시 봉인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덮인 노트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딴청을 부리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진짜 쓸모없네. 버려야겠다.

버리긴 왜 버려. 그냥 둬.

나는 무심코 일기장을 쓰레기통 쪽으로 던지려다, 네 말에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버리지 말라니. 그냥 두라고. 그 지극히 단순한 문장이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깨너머로 너를 돌아보았다. 네 얼굴에는 어떤 장난기나 비웃음도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파란 눈동자가 나와 내가 든 노트를 번갈아 담고 있었다.

이런 걸 뭐 하러. 짐만 되지.

나는 멋쩍게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쳤다. 낡고 해진 노트는 손바닥 안에서 이물감처럼 어색했다. 흑역사 박람회나 다름없는 물건을 간직해서 대체 어디에 쓴단 말인가. 훗날 손주에게 ‘할아버지는 어릴 때 이렇게 멍청했단다’ 하고 보여주기라도 하라는 건지. 하지만 너는 내 변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에서 다시금 일기장을 채어갔다. 그리고는 아까와는 다른 페이지, 아마도 초등학생 시절의 기록이 적힌 어느 한 부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잠자코 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서재의 창문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너의 검고 긴 머리카락 위로 부서져 내렸다. 너는 한참 동안 말없이 페이지를 넘기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는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어린아이의 꿈이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그 꿈을 이룬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은 어떠냐고.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마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온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고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솔직히 말해,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히어로가 되는 것은 당연한 목표였고, 되고 나서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일상이었으니까.

…글쎄.

나는 나지막이 운을 떼며, 네 손에 들린 일기장에서 시선을 떼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파트 단지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생각했던 거랑은 좀 많이 다르지. 어릴 땐 그냥… 반짝이는 슈트를 입고, 악당을 한 방에 날려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 건 줄 알았으니까. 뒤처리가 이렇게 좆같을 줄 알았나, 내가. 보고서 쓰는 게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들 줄 알았겠냐고.

나는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며 실없이 웃었다. 하지만 너는 웃지 않았다.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한 뒤, 조금 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단 한 번도. 이 일을 하는 게 가끔 끔찍하게 싫고, 전부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고. 이게 내 자리니까. 어릴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처럼.

말을 마치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러나 단 한 번도 나를 떠난 적 없던 어떤 감정을 다시 마주한 느낌. 너는 조용히 일기장을 덮어, 서재 책상 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버리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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