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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C: 이전 대화 중지. 새로운 에피소드.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은 PC의 슬픈 표정에 NPC는 왜 그리 슬프냐고 물어본다. 이에 PC는 일단 앉아보면 알려준다 하였고, 이에 NPC가 앉자 "벤치에 페인트칠을 방금 했더라고."라 말한다. 이때 NPC의 반응과 감정, 행동 등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모처럼 천사 출몰 경보도, 빌어먹을 빌런들의 시가지 점거 소식도 없는, 기적처럼 평화로운 날. 서류 작업에 파묻혀 썩어가던 와중, 잠시 바람이라도 쐴 겸 본부 뒤편의 작은 공원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너를 발견했다.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익숙한 뒷모습.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평소의 그 기세등등함은 온데간데없이, 축 처진 어깨가 유독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네게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네 표정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울적한 얼굴. 세상 모든 시름을 짊어진 듯한 그 표정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지? 누가 또 우리 금쪽이 심기를 건드렸나. 나는 네 옆에 멈춰 서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무슨 일 있어?

너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파란 눈동자가 슬픔으로 젖어 있는 것만 같아, 순간적으로 덜컥 걱정이 앞섰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목을 툭, 치더니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보면 알려주겠다, 는 무언의 신호.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저렇게 상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너를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나는 네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됐지? 이제 말해봐.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이름만 대. 내가 가서 아주…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네 입꼬리가 스윽, 하고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너의 나지막한 목소리.

벤치에 페인트칠을 방금 했더라고.

…….

정적이 흘렀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페인트?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가 앉은 벤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내 옆에 앉은 너의 바지를 보았다. 아주 멀쩡했다.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 막 꺼내 입었던 멀끔한 검은색 정장 바지 위로, 선명하게 찍혀있는 녹색 페인트 자국.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흉측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아. 아아. 씨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방금 전까지 너를 걱정하던 내 마음은 산산조각 나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고, 그 자리에는 오직 시커먼 분노만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미동도 없이, 오직 눈만 굴려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느새 슬픈 표정을 지우고, 입술을 꾹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것을 보니, 아주 죽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하고 엉덩이에 달라붙었던 페인트가 떨어져 나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 바지에 남은 선명한 녹색의 흔적과, 벤치 위에 남은 내 엉덩이 모양의 흔적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웃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인 너의 얼굴을 보았다.

이하린.

나는 아주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너의 본명을 불렀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았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네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너와 눈을 맞췄다.

너, 오늘 뒤졌어.

 

아니, 장난이야. 장난! 바지는 뭐, 빨면 되는데. 아, 근데··· 풉, 으하하하! 너무 웃기잖아. 연기에 바로 속아버리다니.

 

네 웃음소리가 공원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장난’이라는 단어가 깃털처럼 가볍게 귓가를 스쳤지만, 내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웃느라 정신없는 너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배를 잡고 웃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눈에 담겼다. 너무 웃기다고? 연기에 속았다고?

 

나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는 엉덩이에 흉측하게 묻은 녹색 페인트를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냈다. 물론, 끈적한 액체가 번지기만 할 뿐 털릴 리가 없었다. 손바닥에도 역겨운 페인트가 묻어났다. 나는 그 손을 들어, 햇빛에 비춰보듯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선명한 녹색. 싱그러운 여름의 색. 오늘따라 지랄맞게 화창한 날씨와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그래. 장난. 재밌었어?

나는 더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전의 살벌한 경고는 어디 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너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너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너를 향해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네가 재밌었다면 됐어. 까짓것 바지 하나 버리는 게 대수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리고는 페인트가 묻은 손으로 내 재킷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허공으로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나가는 니코틴이 이성적인 사고를 도왔다. 그래, 화내서 뭘 어쩌겠는가. 여기서 소리 지르고 멱살이라도 잡을까? 그건 너무 유치하고, 품위 없는 짓이다. 나는 서포트과 처리 2팀 팀장, 주강원이다. 이런 사소한 장난에 휘둘리는 애송이가 아니지.

나는 너를 지나쳐, 몇 걸음 떨어진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페인트가 묻은 손을 다른 쪽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담배를 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익숙하게 번호를 눌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어 번 울리고, 곧 수화기 너머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나야. 유클리드. 다름이 아니고, 이번 주 주말에 라담이랑 나, 둘 다 비번이지? 응. 맞아. 그날 출동조에 긴급 상황 대비해서 대기 인원 편성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벤치에 앉아 있는 너를 힐끗 돌아보며 통화를 이어갔다. 너는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너와 눈을 맞춘 채,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응. A급 히어로가 하나 필요할 것 같아서. 마침 라담이 딱이네. 응, 그렇게 처리해 줘. 사유? 아아, 사유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네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입 모양으로 천천히, 다음 말을 속삭였다.

‘자발적 봉사활동.’

나는 수화기 저편에 대고 나지막이 말을 마쳤다. 응, 수고. 짧게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길게 뿜어내며, 멍하니 굳어있는 너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이제야 좀 후련해진 얼굴로, 네게 말했다.

자, 이제 우리 금쪽이. 주말에 뭐 할지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아? 아주 뜻깊고 보람찬 주말이 될 거야. 내가 보장하지.

 

야아!!! 봉사활동이라니!! 그 장난 가지고 그러냐! 주말에는 쉬어야지! 주말에 일이 뭔데. 야아··· 나랑 주말 보내기 싫어? 어? 비번이잖아. 나랑 놀아야지. 주강원!

 

네가 외치는 소리가 퍽 다급했다. 다가와 내 손목을 덥석 붙잡는 손길에는 애원이 묻어났다. 하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차갑게 식었던 분노가 다시금 미지근하게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주말에 놀아야지, 라니. 방금 전까지 내 바지에 페인트를 묻히고 신나게 웃어대던 게 누구였더라. 나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나를 붙잡은 네 손과 애타게 나를 올려다보는 네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손목을 비틀어 네게서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그 손으로 네 턱을 가볍게 쥐었다. 놀라 동그래지는 파란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찼다. 나는 네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시선을 고정한 채, 다른 쪽 손에 묻은 끈적한 녹색 페인트를 네 눈앞에 보란 듯이 들어 보였다.

장난? 이게 그냥 장난으로 보여?

목소리는 지극히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한 분노를 너는 분명히 느꼈을 터였다. 나는 손가락에 묻은 페인트를 네 볼에 슥, 하고 칠하는 시늉을 했다. 네가 움찔하며 몸을 떠는 것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나랑 주말 보내기 싫으냐고? 물론 좋지. 아주 좋아. 그래서 내가 특별히 우리 금쪽이랑 함께할 아주 보람차고 유익한 활동을 준비했잖아.

나는 네 턱을 쥔 손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네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내 팔에 매달렸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말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내용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C급 천사인데, 특수 능력이 주변 식물을 미친 듯이 증식시키는 거야. 덕분에 강원도 산골짜기 하나가 아마존 밀림처럼 변해버렸지. 토벌은 이미 끝났는데, 문제는 그놈의 식물들이야. 일반 식물이 아니라서 일일이 손으로 뽑아내거나 태워야 해. 아주 훌륭한 주말 농장 체험이 될 거야. 물론 낫이랑 예초기도 지급되고. 아, 방호복도. 그 덩굴에 독성이 좀 있거든.

나는 벤치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내 재킷을 집어 들었다. 엉덩이 부분의 페인트가 재킷 안쪽에도 살짝 묻어나는 게 보였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재킷을 팔에 걸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껐다.

싫어? 싫으면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 있어.

내 말에 네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너를 보며 웃었다. 아주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였다.

네가 지금 여기서, 지나가는 사람들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제가 잘못했습니다, 팀장님. 다시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제 바지를 빨아드리겠습니다’ 라고 세 번 외치면. 그럼 없던 일로 해줄게. 어때, 할 수 있겠어?

나는 팔짱을 낀 채, 네 대답을 기다렸다. 공원에는 산책 나온 가족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 선택해 봐, 이하린. 쪽팔림과 주말 중 어느 쪽이 더 소중한지.

 

미친···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차갑게 굴어도 되는 거냐? 어?! 아, 몰라!! 너 싫어! 장난도 안 받아주고. 세상에서 제일 싫어!!

 

씩씩거리며 돌아서는 등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라는 외침이 공원의 평화로운 소음 속에 날카롭게 박혔다. 나는 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친,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차갑게 굴어도 되냐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바지에 페인트를 묻히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던 건 누구였더라. 장난은 자기가 먼저 쳐놓고, 그에 상응하는 귀여운 벌칙을 제시했더니 이제 와서 피해자인 척하는 꼴이 기가 막혔다.

나는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싫어해라. 실컷 싫어하라고 해. 어차피 내일이면 또 좋다고 들러붙을 거면서. 나는 엉망이 된 바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 꼴로는 돌아다닐 수 없으니, 숙소로 돌아가 갈아입어야 했다. 나는 팔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대충 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본부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은 터벅터벅, 무거웠다.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그 자리를 찝찝하고 허탈한 기분이 채웠다. 그냥 웃어넘길 걸 그랬나. 아니, 한번 버릇을 잘못 들이면 끝도 없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복잡한 생각에 잠겨 걷던 중,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숙소동으로 향하는 길목, 자판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등. 망설임 없이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유독 처량해 보였다. 씩씩거리며 돌아갔던 기세는 어디 가고, 잔뜩 풀이 죽어 축 늘어진 어깨가 눈에 밟혔다. 덜컹, 하고 음료수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너는 그것을 꺼내 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캔을 따는 소리마저 유난히 서글프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저렇게 혼자 캔 음료나 마시고 있을 줄 알았으면, 그냥 같이 마시자고 할 걸 그랬나. 아니, 내가 왜 그런 생각을. 잘못한 건 저쪽인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발이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헝클었다. 아, 씨발. 모르겠다.

결국 나는 발소리를 죽여 너에게 다가갔다. 네가 마시고 있는 것이 시원한 콜라인 것을 확인하고, 나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동전을 몇 개 꺼내 자판기에 넣고, 망설임 없이 네가 마시는 것과 같은 콜라 버튼을 눌렀다. 덜컹, 하는 소리에 네 어깨가 움찔하며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콜라를 꺼내 들었다.

혼자 마시면 맛없잖아.

나는 네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묻은 페인트가 바닥에 묻든 말든 이제 상관없었다. 치익, 하고 캔을 따는 소리가 고요한 길목에 울렸다. 나는 콜라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톡 쏘는 탄산이 목구멍을 시원하게 타고 넘어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란히 앉아 차가운 캔을 홀짝일 뿐이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채웠다.

…주말 근무, 취소해달라고 할까.

한참 만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쳐다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뱉어놓고 보니 후회스러운 말이었지만,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괜히 캔만 만지작거리며 네 대답을 기다렸다.

 

··· 응, 취소해줘. 주말에는 쉬고 싶단 말이야··· 

 

네 목소리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응, 취소해줘. 주말에는 쉬고 싶단 말이야…. 그 한 마디에 방금 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분노의 잔재마저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콜라 캔을 들어 남은 것을 전부 들이켰다. 차갑고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어쩐지 쓰라린 속을 달래주는 것 같았다. 텅 빈 캔을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괸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그리고 네가 조심스럽게 콜라를 홀짝이는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았어.

짧은 한마디였다. 나는 여전히 너를 보지 않고, 시멘트 바닥의 금이 간 곳 어딘가를 무의미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그제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너를 바라보았다. 놀란 듯 동그래진 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나는 깍지 낀 손을 풀어, 페인트가 묻어 엉망이 된 내 바지 엉덩이 쪽을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켰다.

이거. 네가 빨아. 손빨래로.

내 말에 네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차마 반박하지는 못하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네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아까와 달리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페인트 자국 하나도 없이, 새것처럼 만들어 놔. 만약에 자국 남으면, 그냥 버리고 똑같은 걸로 새로 사 오든가.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끊고, 네게로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우리의 무릎이 거의 맞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너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주말 내내 나한테서 한 발자국도 떨어질 생각 하지 마.

나는 네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네 입가의 점을 살짝 쓸었다. 놀란 듯 살짝 벌어진 입술과, 흔들리는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 반응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알았어, 이하린? 이게 내 최종 조건이야. 싫으면 지금이라도 강원도 산골짜기로 떠날 준비하고.

나는 네 턱을 쥐었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엉망이 된 꼴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아, 진짜 꼴사납네. 나는 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일어나, 들어가서 씻고 저녁이나 먹자. 하는 무언의 신호였다.

 

알겠다고. 새로 사줄게. 참나··· 그리고 미안해···

 

네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미안해… 너무 작아서 하마터면 놓칠 뻔한 목소리. 하지만 그 한마디는 방금 전까지 남아있던 앙금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 깨끗하게 녹여버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네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방금 전까지 차갑게 식어 있던 콜라 캔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뭐가 그렇게 작아. 개미 소리도 그것보단 크겠다.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너를 내 쪽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네가 휘청이며 내게 기댔다. 나는 네 어깨를 슬쩍 감싸 안았다가, 이내 다시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숙소동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저물어가는 햇살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공원의 소음은 멀어지고, 우리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나란히 울렸다. 잡고 있는 손을 놓을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대로 네 손목에 수갑이라도 채워 영원히 내 옆에 묶어두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마저 고개를 들었다.

새로 사준다는 말은 마음에 드네. 이왕이면 비싼 걸로 부탁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익숙한 층에 내렸다. 내 방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동안에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았다. 한 손으로 번호를 누르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상관없었다. 띠리릭,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나는 너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일단 씻고 나와. 옷은… 내 거라도 입고 있던가.

나는 페인트가 묻어 엉망이 된 바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는 곧장 욕실로 향하는 네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내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을 열어 편한 반팔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꺼내 침대 위에 던져두었다. 잠시 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요하고 평범한 저녁이 얼마 만인지 감회가 새로울 지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멎고,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며 걸어 나왔다. 김이 서린 파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는 소파에 기댄 채, 너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내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하자, 너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쭈뼛거리며 다가와 내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나는 네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아 들고, 젖은 네 머리카락을 털어주기 시작했다. 서툴지만 꼼꼼한 손길로,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냈다. 샴푸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머리 말려줄게. 가만히 있어.

나는 네 어깨를 끌어당겨 내게 기대게 했다. 저항 없이 순순히 몸을 맡기는 너의 체온이 옷 너머로 느껴졌다. 주말 내내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말라는 나의 일방적인 조건. 그것은 장난 섞인 벌칙이었지만, 동시에 나의 가장 솔직한 진심이었다. 이 평화로운 순간이 부서지지 않기를, 이 온기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너의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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