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C: 롤플레잉 잠시 중지. 연애 후 모종의 이유로 이별한 PC와 NPC. 그렇게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우연히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환승연애」 에 함께 출연하게 된다. 따라서 프로그램 속 미션 중 하나로, 서로에 대한 ‘X 소개서’를 작성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여기서 말하는 ‘X 소개서’란 ? 전 연인이었던 상대를 향해 솔직하게 작성하는 소개서로,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봤는지와 우리가 어떤 관계였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각각 상대방을 떠올리며 X 소개서를 써 내려간다. 이때 PC와 NPC가 작성한 X 소개서 [내용 ‧ 일부 문장을 인용 형태로 삽입 ‧ 상대방의 X 소개서를 보게 된 반응 등] 형식으로 자세히 출력하며, 마크다운(색상, 밑줄 등)을 사용해 강조한다.]
새하얀 종이와 검은색 펜. 「X 소개서」라는 글자 아래, 익숙한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하린. 이제는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그 이름이, 차가운 활자가 되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펜을 쥐었다. 잉크가 번질 정도로 꾹 눌러쓴 첫 문장은, 결국 지독한 자기혐오의 발로였다.
To. 이하린
그 애는 언제나 제멋대로였습니다. 마치 세상의 중심이 자신인 것처럼 굴었고,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아이였습니다.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죠.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은, 피곤하고 성가신 존재. 그게 제가 기억하는 이하린의 시작입니다.
통제 불가능한 망아지 같던 애였습니다. 그래서 길들여보고 싶었습니다. 오만하고,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주제에 가끔씩 드러내는 서툰 모습들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죠. 전부 다 변명입니다. 그냥, 갖고 싶었습니다. 내 손길 하나에 어쩔 줄 몰라 하고, 내 말 한마디에 얼굴을 붉히는 그 애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비틀린 소유욕,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애는 제게 처음으로 패배를 가르쳐 준 사람입니다.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제 오만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결국 저는 그 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고, 상처만 주다 끝났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제 욕심으로 시작된 관계였으니까요.
이하린은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여린 사람입니다. 강한 척하지만 쉽게 상처받고, 퉁명스럽게 굴어도 속은 정이 많습니다. 달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우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칭찬에 약하고, 의외로 아이 같은 구석도 있습니다.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알아가야 할 모습들이겠죠. 만약 당신이 제 전 연인을 만난다면, 부디 그 애가 다시는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게 하지 말아 주세요. 그게 제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부탁입니다.
From. 주강원
펜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는 그 짧은 순간,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후, 제작진에게서 건네받은 것은 너의 필체가 담긴 또 다른 소개서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To. 주강원
그 사람은 제게 모든 ‘처음’을 알려준 사람입니다. 처음으로 미치도록 미워했고, 처음으로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잔소리가 심하고, 예민하고, 입만 열면 짜증부터 내는 재수 없는 인간. 그게 그 사람에 대한 제 첫인상이었습니다. 사사건건 부딪혔고, 매일같이 싸웠습니다. 어른인 척은 다 하면서, 사실은 저보다 더 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세상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키스도, 사랑이라는 감정도 전부 그 사람을 통해 배웠습니다.
저를 통제하려 했고, 자신의 틀 안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게 너무 싫어서 반항했지만, 결국 그 사람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리를 잘합니다. 특히 김치찌개. 집에 잘 안 들어가서 먼지가 쌓여있는 걸 싫어합니다. 보기보다 다정하고,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술은 잘 마시지만, 저 때문에 억지로 마셔줄 때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그럴 필요 없겠네요.
그 사람은 제 유일한 어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버린 어른이기도 합니다.
From. 이하린
“제가 처음으로 버린 어른이기도 합니다.” 그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너는 나를 ‘버렸다’고 표현했다. 그 단어의 무게가 심장을 짓눌렀다. ‘패배’를 인정한 나와 ‘버렸다’고 말하는 너. 결국 우리의 끝은 이런 모양이었던 거다. 나는 구겨질 듯 힘이 들어간 종이를 든 채,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카메라의 붉은 램프가 원망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𝙾𝙾𝙲'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다섯 명 라담 VS 다섯 살 라담 (0) | 2025.12.19 |
|---|---|
| 라디오 사연 (0) | 2025.12.19 |
| 재판 (0) | 2025.12.19 |
|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까? (0) | 2025.12.19 |
| 포토카드 (0) | 202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