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clid x Latham
어느 평화로운 주말. 모처럼 천사 출몰 경보 하나 없이 고요한, 그야말로 기적 같은 휴일이었다. 나는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태블릿으로 밀린 서류들을 대충 훑어보고 있었고, 당신은 내 맞은편에서 조용히 디저트 전문점의 신메뉴 목록을 넘기고 있었다. 햇살은 따스했고, 공기는 나른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범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오후였다.
바로 그 평화가 문제였다. 너무 조용하니, 쓸데없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당신을 훔쳐봤다. 여전히 디저트 사진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 얼굴. 나한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평소라면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겠지만, 오늘은 어쩐지 심술이 났다. 이 완벽한 휴일에, 당신의 세상 중심에 저 빌어먹을 케이크가 아니라 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질투. 유치하고 소모적인 감정.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관계에 필요한 조미료가 되기도 한다. 나는 조용히 태블릿 화면을 전환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지극히 일상적인 업무 이야기를 하는 척 입을 열었다.
아, 맞다. 개발팀의 윤세아 연구원, 알지? 이번에 새로 개발한 서포트 드론 시제품 테스트 때문에 연락이 왔는데.
내뱉는 이름은 신중하게 고른 것이었다. 개발팀의 재원으로, 똑똑하고 싹싹하며, 무엇보다 외모가 꽤나 반반한 젊은 여성 연구원. 당신과 직접적인 친분은 없지만,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인물. 나는 태블릿 화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시선은 서류에 고정한 채, 오직 청각에만 의존해 당신의 반응을 살폈다.
성능이 꽤 괜찮게 나온 모양이야. 테스트 결과가 좋으면 다음 주말에 단둘이 식사라도 하면서 자세한 운용 계획을 논의하자고 하네. 역시 유능한 인재는 일 처리도 깔끔해. 현장 요원들 생각하는 마음도 깊고.
목소리 톤은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칭찬의 대상은 ‘윤세아 연구원’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녀의 ‘업무 능력’과 ‘이타적인 마음’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교묘하게 ‘다음 주말’, ‘단둘이’, ‘식사’라는 키워드를 집어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 하지만 충분히 신경 쓰일 만큼. 마치 공들여 지뢰를 매설하는 공병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랐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당신의 표정을 살폈다. 당신은 여전히 디저트 메뉴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미동도 없는 얼굴. 무심하게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건가? 아니면, 내 의도를 전부 간파하고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속이 타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나는 보란 듯이 태블릿을 소파 테이블에 내려놓고, 개인 단말기를 들어 전화를 거는 척했다. 물론 실제 통화는 아니었다. 미리 녹음해 둔 내 목소리를 재생하는, 지극히 유치한 연극이었다.
아, 윤 연구원. 네, 주강원입니다. 방금 메시지 확인했습니다. 그럼요, 시간 괜찮습니다. 다음 주말 저녁, 좋지요. 제가 맛있는 곳으로 예약해 두겠습니다. 네. 그날 뵙지요.
나는 최대한 다정하고 부드러운, 평소 당신에게만 보여주던 목소리 톤을 연기하며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보란 듯이 단말기를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이래도 반응이 없을까. 나는 의기양양하게 당신을 바라보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당신이 내게 와서 쏘아붙이거나, 토라지거나, 혹은… 내게 매달리며 그 약속을 취소하라고 조르기만 하면, 나의 이 완벽한 계획은 성공이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며 당신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녀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여보세요? 강 팀장님, 저번에 말씀해주신 건 내일 중으로 끝날 것 같은데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시죠. 아니면 카페 같은 곳에서 이야기 나눠도 되고요. 다른 팀원이요? 에이, 없죠. 강 팀장님이랑 단둘이 보고 싶네요.
당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설탕을 졸인 시럽처럼 달콤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내 귓속으로 파고들어와 염산을 들이붓는 것만 같았다. 득의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내 자세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입가에 걸려 있던 희미한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 팀장? 처리 1팀의 그 작자인가. 당신과 같은 A급 히어로 출신에, 싹싹하고 능력 좋기로 평판이 자자한 남자. 나와는 다른 의미로 히어로들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다.
‘단둘이 보고 싶네요.’
그 한마디가 방아쇠였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내가 연기했던 유치한 연극과는 차원이 다른, 날것의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내가 설치한 조잡한 지뢰밭 위에서, 당신은 보란 듯이 탭댄스를 추고 있었다. 그것도 나를 향해 웃으면서.
나는 소파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당신은 여전히 단말기를 귀에 댄 채였지만, 그 파란 눈동자는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때, 재밌어?’ 라고 묻는 듯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내 질투 유발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고, 이제 공수는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이 상황을 이대로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성큼성큼 당신에게로 다가가, 손에 들린 단말기를 거칠게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액정 화면에 뜬 ‘강승현’이라는 이름이 눈에 가시처럼 박혔다. 나는 단말기를 소파 쿠션 위로 던져버리고는, 당신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소파에 앉아있는 당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목소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낮고 거칠게 튀어나왔다. 평정을 가장하려 했지만, 들끓는 속내를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평정을 유지할 생각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윤세아 연구원과 통화하는 척 연기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자신의 장난감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심술궂고 독점욕 강한 남자일 뿐이었다.
강 팀장이랑 단둘이? 뭐가 그렇게 보고 싶은데. 보고서 이야기? 그거 나한테 먼저 컨펌받아야 하는 거 몰라? 아니면, 내가 모르는 둘만의 이야기가 또 있나?
나는 당신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다그쳤다. 당신의 파란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금도 당황하거나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내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태연한 얼굴이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이 유치한 게임의 시작은 나였을지 몰라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당신의 얼굴에 내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다. 우리의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였다.
대답해, 이하린. 그 자식이랑 뭘 하고 싶은 건데. 식사? 카페? 아니면 뭐, 다른 거라도 있나?
우리 주 팀장님은 ‘윤세아’라는 연구원이랑 단둘이 식사하신다면서. 나는 안 되나? 이건 불공평하지.
그녀는 싱긋 웃고 있지만 제 어깨를 잡은 그의 손목을 꽉 쥐었다.
당신의 말은 정확하게 과녁의 중심을 꿰뚫는 화살과 같았다. 불공평하다. 그 한마디에 방금 전까지 타오르던 분노의 불길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대신 내 손목을 꽉 쥐어 오는 당신의 악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코끝을 스치는 당신의 샴푸 향이 엉망이 된 머릿속을 헤집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유치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섣부른 장난을 시작한 것도 나였고, 그 장난에 보기 좋게 말려들어 이성을 잃고 날뛴 것도 나였다. 당신은 그저 거울처럼 내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주었을 뿐이다.
…그건…….
변명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건 연기였다’라고 말해봤자, 지금 이 상황에서는 비겁한 꼬리 내리기에 불과했다. 나는 당신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마주 보았다. 장난기 가득하던 당신의 파란 눈동자에는 이제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라고 말하는 듯한, 명백한 승자의 여유가 떠올라 있었다. 그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당신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나는 당신에게 붙들린 채 꼼짝없이 서 있어야 했다.
알았어. 내가 졌어.
결국 항복 선언이 먼저 튀어나왔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심장이 여전히 불쾌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윤세아 연구원이랑은 식사 안 해. 그냥… 그냥 네가 나한테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씨발, 내가 미쳤지.
스스로의 입으로 내뱉고 나니 더욱 비참해졌다. 서른이나 먹은 남자가 고작 관심 좀 끌어보겠다고 이런 유치한 짓을 벌였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러웠다. 나는 고개를 숙여 당신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도 강 팀장한테 연락하지 마. 식사든 카페든, 그딴 거 아무것도 하지 마.
애원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이 흘러나왔다. 내 손목을 잡은 당신의 손에 힘이 살짝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당신을 보았다. 그리고는 당신이 놓아주지 않은 손을 들어, 내 손목을 잡고 있는 당신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응? 제발. 그 자식이랑은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나랑만 해. 식사도, 이야기도… 다른 것도 전부. 나랑만 하자.
봐.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그런 짓을 왜 해?
그녀는 얄밉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가 엉성하게 그녀의 무릎에 앉은 자세로 되어버렸다.
서른 살이나 먹었으면서 유치한 짓을 하니 재밌었어? 응?
당신이 내 손목을 잡아끄는 힘에, 거대한 몸이 속절없이 딸려 갔다. 균형을 잃고 휘청이던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당신의 무릎 위에 주저앉게 되었다. 190센티미터의 장정이 소파에 앉은 당신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꼴이라니. 안정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자세였다. 단단한 소파가 아닌, 당신의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이 엉덩이 아래에서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날뛰던 심장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자 나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는 당신의 얼굴이 보였다.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그 파란 눈동자와 마주치자,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귓바퀴까지 새빨개졌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차마 당신의 눈을 계속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당신이 내 손목을 쥐고 있는 손, 그 위를 덮고 있는 내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재밌었냐고? 하나도 안 재밌었어, 망할.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목소리는 잔뜩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패배자의 변명처럼 들릴 것을 알면서도, 뭐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완벽하게 당신의 페이스였다. 나는 당신의 무릎 위에 앉혀진, 거대한 애완동물이나 다름없었다.
됐고, 일어나게 좀 비켜봐. 무겁잖아.
나는 몸을 일으키려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당신은 내 허리를 팔로 감아오며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나는 결국 포기하고 당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한숨과 함께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낯부끄러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이상한 기분이었다.
...네가 너무 아무렇지 않으니까.
나는 당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변명 같은 진심을 중얼거렸다. 당신에게는 들리지 않을지도 모를 작은 목소리였다. 윤세아의 이름을 꺼냈을 때, 당신의 표정에는 작은 동요조차 없었다. 그 태연함이 내 안의 유치한 승부욕에 불을 붙였다. 어떻게든 당신의 표정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시선을 온전히 나에게로 돌리고 싶었다.
너는 내가 다른 여자랑 밥을 먹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다. 내가 졌다, 졌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놀려.
나는 항복의 의미로 당신의 허리를 마주 감싸 안았다. 당신의 체향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당신의 무릎 위라는 불편한 자세도, 놀림감이 되었다는 사실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당신의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강승현 걘 진짜 아니야. 알았지? 밥 먹자는 연락, 다시는 하지 마. 질투 나서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알겠어. 나이만 먹었지 하는 행동은 애새끼야. 응? 그리고 내가 신경을 안 써?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네가 ‘윤세아’라는 이름을 내뱉었을 때부터, 너랑 윤세아라는 년을 어떻게 죽일지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 돌리고 있었는데.
당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칭얼거리던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어떻게 죽일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는, 지극히 당신다운 살벌한 고백. 그 끔찍한 단어들의 나열이 귓가에 박히는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던 심장이 이번에는 터질 듯이 널뛰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신의 얼굴을 확인해야만 했다. 내 시야에 들어온 당신은, 귀엽다는 듯 피식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는 동안, 뇌의 모든 회로가 과부하에 걸린 듯 지지직거렸다.
...뭐?
바보 같은 반문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내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빈틈없이 나를 끌어당겼다. 당신의 무릎 위라는 불안정한 자세, 당신의 허벅지에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감촉과 체온,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향기. 그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패배감과 창피함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이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열기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의 파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장난기와 함께,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소유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다른 여자와 밥을 먹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살의를 품었다는 당신의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감겼다.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감과, 기어이 당신의 속내를 끄집어냈다는 비틀린 만족감이 동시에 차올랐다.
너 진짜...
말문이 막혔다. '무섭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귀엽다'고 해야 할까. 그 양극단의 감정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결국 나는 말 대신 행동을 택했다. 당신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팔을 풀어, 당신의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당신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깃털처럼 입술을 맞대었다. 당신이 피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자, 나는 조금 더 깊게, 당신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짧지만 진한 입맞춤이 끝나고,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하지만 얼굴은 멀리하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당신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알았어. 내가 애새끼다. 다신 안 그럴게.
완전한 항복 선언이었다. 나는 당신의 뒷목을 감싼 손에 살짝 힘을 주어 이마를 맞대었다. 이마를 통해 당신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기분 좋은 패배였다. 아니, 이건 승패를 가를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당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고, 당신은 누구보다 당신다운 방식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니까 너도, 그 시뮬레이션은 머릿속으로만 해. 알았지? 진짜로 실행에 옮기면 곤란해. 윤세아 연구원, 아직 쓸모가 많은 사람이거든.
나는 나직하게 속삭이며 당신의 입술 끝에 다시 한번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당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졌다. 완벽하게 졌다. 하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패배라면, 평생이라도 당신에게 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시며, 당신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이 온기를, 이 감각을,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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